문묘 배향(文廟配享) 동국18현(東國十八賢)
우리 나라 문묘 제도는 중앙에 성균관(成均館)이 있고, 각 고을에 향교(鄕校)가 있으며, '대성전(大成殿)'에서는 공자(孔子) 이하 고대 중국 이래의 성(聖) 현(賢) 제위(諸位)와 우리 나라 '18현'의 위패를 봉안하고 향사(享祀)를 하는데, 중앙 '성균관'에서는 5성(五聖), 공문 10철(孔門十哲), 송조 6현(宋朝六賢), 중국 역대제현(歷代諸賢) 94위 및 동국 18현 도합 133위를 봉향(奉享)한다. 그리고 각 고을 향교 중에서 주(州), 부(府), 군(郡) 곧 목사(牧使), 부사(府使), 군수(郡守)가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위 중설위(中設位)라 하여 '5성, 공문 10철, 송조 6현, 동국 18현'등 39위를 봉향하며, 현(縣) 곧 현령(縣令), 현감(縣監)이 다스리는 고을에서는 소설위(小設位)로 '5성, 송조 4현(周濂溪, 程明道, 程伊川, 朱晦菴), 동국 18현' 등 27위만 봉향한다.
No | 성명 | 관향 | 아호 | 관직 및 시호 |
1 | 설 총 | 경 주 | 우 당 | 신라 고승 원효(元曉)의 子로 신문왕(神文王) 때 한림(翰林)으로 호는 빙월당(氷月堂) 홍유후(弘儒侯)로 추봉(追封) |
2 | 최치원 | 경 주 | 고 운 | 신라 때 당(唐) 나라로 가 수학(修學)하고 돌아와 한림학사(翰林學士)로 호는 고운(孤雲)시호는 문창후(文昌侯) |
3 | 안 유 | 순 흥 | 회 헌 |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수문관태학사(修文館太學士)로 호는 회헌(晦軒) 시호는 문성공(文成公) |
4 | 정몽주 | 연 일 | 포 은 |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문하시중( 門下侍中)으로 호는 포은(圃隱) 시호는 문충공(文忠公) |
5 | 김굉필 | 서 흥 | 한훤당 | 형조좌랑(刑曹佐郞)이었고 조선 중종(中宗) 때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한훤당(寒喧堂)시호는 문경공(文敬公) |
6 | 정여창 | 하 동 | 일 두 | 현감(縣監)이었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일두(一蠹) 시호는 문헌공(文獻公) |
7 | 조광조 | 한 양 | 정 암 | 대사헌(大司憲)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정암(靜庵)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
8 | 이언적 | 여 주 | 회 재 | 좌찬성(左贊成)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회재(晦齋)시호는 문원공(文元公) |
9 | 이 황 | 진 성 | 퇴 계 | 대제학(大提學)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퇴계(退溪)시호는 문순공(文純公) |
10 | 김인후 | 울 산 | 하 서 |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하서(河西)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
11 | 이 이 | 덕 수 | 율 곡 | 이조판서(吏曹判書)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율곡(栗谷) 시호는 문성공(文成公) |
12 | 성 혼 | 창 녕 | 우 계 | 좌참찬(左參贊)이었고 우의정(右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우계(牛溪) 시호는 문간공(文簡公) |
13 | 김장생 | 광 산 | 사 계 | 형조참판(刑曹參判)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사계(沙溪) 시호는 문원공(文元公) |
14 | 조 헌 | 백 천 | 중 봉 | 첨정(僉正)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중봉(重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
15 | 김 집 | 광 산 | 신독재 |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신독재(愼獨齋) 시호는 문경공(文敬公) |
16 | 송시열 | 은 진 | 우 암 | 좌의정(左議政)이었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우암(尤庵)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
17 | 송준길 | 은 진 | 동춘당 | 이조판서(吏曹判書)였고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으며 호는 동춘당(同春堂) 시호는 문정공(文正公) |
18 | 박세채 | 반 남 | 현 석 | 좌의정(左議政)이었고 호는 현석(玄石)시호는 문순공(文純公) |
우리 광김은 위 표에서 보듯이 예학(禮學)의 태두로 문묘에 배향된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두 분 선조가 계셨을 뿐 아니라 고려조에서도 '공자' 이래의 유학과 문묘의 제도를 처음 도입한 7세 문안공 휘 양감(良鑑)이 드러났고, 조선초부터 도덕과 학행이 뛰어난 분들이 많이 나와서 유학(儒學)의 대통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예문(禮文) 종가(宗家)로서 조선 사회의 정신을 지배한 대학자들이 연면히 이어져 왔음을 자랑으로 삼는다. 대종회보학자료 孤巖/準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