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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08 11:11

문묘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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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를 주도한 양반관료들은 기본적으로 유학을 신봉하던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중국의 춘추시대의 공자가 집대성하고 남송 대의 주희가 재정리한 유학, 즉 주자학을 종교적 정열로 신봉했다. 가정과 사회 그리고 국가의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원동력이 주자학이라는 확신을 가졌던 것이다.

성균관이나 향교에서 공자를 모신 건물을 문묘라고 하였는데, 이는 공자로 상징되는 유교가 중국문화권에서 문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 문의 대표자는 공자였고, 무의 대표자는 관우였다. 관우를 모신 건물은 문묘에 대응하여 무묘라고 하였다.

문치주의하에서의 조선에서는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반드시 문묘를 설치했지만, 무묘는 설치하지 않았다. 무묘는 임란시에 명나라 병사들이 건설한 이후 관왕묘란 이름으로 몇몇 세워졌지만, 문묘에 비한다면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는문치주의로 불릴 정도로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주자학을 편향적으로 숭상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한양의 성균관과 지방의 향교에 건설된 문묘에는 유학의 발전에 기여한 중국과 한국의 유명학자들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면서 학생들의 사표로 삼았다. 나아가 성균관과 향교에 모셔지는 학자들을 문묘배향공신이라고 불러 최고의 영예와 권위를 부여했다. 조선시대 문묘배향공신을 배출한 가문은 최고의 학자 가문으로 존경받았으며, 국가에서는 기회가 되는 대로 그 후손들을 특채했다.

조선시대의 문묘는 공자를 모신 중앙의 대성전과 그 앞의 좌우에 세운 동무와 서무로 이루어졌다. 중앙의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시한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중국의 유학을 상징하는 총 21명의 학자들을 모셨다. 동무와 서무에는 그외의 중국학자들과 우리나라 출신의 유학자들을 모셨다.

한국의 역사에서 최초로 한국사람을 문묘에 배향한 것은 고련 현종 11년(1020) 8월이었다. 당시 최치원을 문묘에 배향했는데, 신라사람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가서 유교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공로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2년 후인 현종 13년(1022) 1월에는 신라의 설총을 문묘에 배향했다. 불교가 성행하던 신라에서 유교를 학습하고 실천한 설총의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이로써 최치원과 설총은 한국의 유교역사에서 태두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려말인 충숙왕 6년(1319)에는 안향이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주자학을 학습하고 국학을 진흥시킨 공로가 평가된 것이다. 고려시대 문묘에 배향된 최치원, 설총, 안향은 사실상 신라와 고려시대의 유학을 대표하기도 하였다. 문묘배향공신의 지위와 영향력은 조선시대에 들어오면서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조선사회가 유교화될수록 유교를 대표하는 문묘배향공신의 중요성이 급속도로 증대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최초로 문묘에 배향된 공신은 정몽주였다. 조선개국 이후 정몽주, 권근 등을 문묘에 배향하자는 요구가 줄기차게 있었지만, 결국은 정몽주가 중종 12년(1517) 9월 17일에 배향된 것이다. 정몽주의 신위는 최치원의 신위 다음에 자리했다.

중종 당시 조광조로 대표되던 사림 세력은 조선건국의 주체세력이었던 권근보다는 고려왕조에 절개를 지키고 목숨을 바친 정몽주가 조선유교의 태두라고 존경해 마지 않았다. 정몽주가 문묘에 배향됨으로써, 조선시대의 유교는 권근 계열의 실용적 유교보다는 정몽주 계열의 도학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가 주류로 자리잡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시대에 문묘에 배향된 유학자들은 모두가 정몽주를 연원으로 내세우는 도학자들이었다. 예컨데 광해군 2년(1610) 7월 16일에 문묘배향공신으로 결정된 이른바 5현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은 자타가 공인하는 도착자이며 의리학자들이었다.

임란 이후 당쟁이 격화되면서 문묘배향공신도 당쟁의 대상이 되었다. 즉 서인과 남인, 노론과 소론 등의 당파는 경쟁적으로 자신들에게 유리한 인물을 문묘에 배향시키고자 하였다. 이 결과 당파가 바뀔 때는 문묘배향공신까지 바뀌는 일도 있었다. 예컨데 서인의 연원으로 상징되는 이이와 성혼은 경신대출척으로 서인이 중앙권력을 장악한 후 문묘배향공신이 되엇지만, 기사환국으로 서인이 힘을 잃으면서 문묘에서 축출되었다. 이이와 성혼은 갑술환국에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한 이후 다시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숙종대 이후 문묘배향공신은 박세채를 제외하면 모두가 노론계 인물들이었다. 이는 숙종대 이후 노론이 당쟁에서 최종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이다. 박세채의 경우는 탕평을 모색하던 숙종이 일찍이 탕평론을 주장한 박세채를 높이 평가하여 문묘에 배향될 수 있었다. 그를 제외한 인물들, 즉 김인후,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은 노론 계열의 학문적, 정치적 연원을 상징하는 사람들이었다.

문묘배향공신은 학문적 업적을 정치, 군사적 업적 못지않게 중시한 조선시대 문치주의의 결과였다. 문묘배향공신은 한국의 유학사 및 학문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들로서 정공신이나 종묘배향공신보다도 더 높은 명예를 누렸다. 학문과 문화를 중시한 조선시대의 특징이 문묘배향공신 제도 극명히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문묘배향공신 한국인
설총, 최치원, 안향,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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