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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천위 인경 묘지명

 광산 김씨가 씨족이 크고 또 멀어서 고려조에 휘 여는 문화 시랑 찬성사로 시호는 양간공이요 휘 사원을 낳았으니 첨의 찬성사로 시호는 정공이요 그분이 휘 진을 낳았으니 정당문학 예문관 대제학으로 시호은 장영공이요. 그분이 영리를 낳았으니 군기 감사요. 그분이 휘 정을 낳았으니 중대광 광성군이요. 그분이 약채를 낳았으니 충청도 도 관찰사로 조반에 옥사를 바르게 처리하므로 고려말에 이름이 높았고. 그분이 문을 낳았으니 좌찬성에 추증 되었고. 그분이 철산을 낳았으니 사헌부 감찰인데. 맏아들 국광이 정승이 됨으로 영리 정부사 강성부원군에 추증 되었으니 곧 공의 고조이다. 증조의 휘는 겸광이니 의정부 좌참찬 세자좌 빈객으로 좌리공신 광성군에 책봉되고 시호는 공안공이요. 할아버지의 휘는 극개이니 예조 참판이요. 아버지의 휘는 헌윤이니 호조 참의요. 공으로 인하여 이조판서 겸 의금부 춘추관사에 추증되였고 어머니는 용인 이씨이니 동지 중추부사 안세의 따님이다. 공이 중종 을해 1515 4월 갑오일에 출생하니 휘는 인경이요. 자는 경유로서 7세에 중종 대왕의 따님 혜순 옹주의 짝으로 선발되어 순의 대부 광천위에 제수되었다. 중종정해 1527년에 옹주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작서 (세자 인종을 저주하던 일로 진범은 김안로의 아들 연성위 김희로 밝혀졌다). 의 화를 만나 상주로 쫓겨 간 뒤 계사 (1533) 년에 김안로가 다시 옥사를 일으켜 당성이 홍려가 장살 되었고 또 박씨와 그 아들 복성군 미을 죽였고 공도 또한 서천으로 귀한 갔다가 이듬해인 갑오년에 공주로 옮겨 귀양살이를 하였는데 정유 1537년 겨울에 안로가 복주 되므로 공은 즉시 석방되어 복작 되었고 명종 병오 1946년에 원종 공신으로 책록되어 자의대부로 승진되었다. 경신 1560 년에 임금이 종실 부마들을 모아 재술시를 보이는데 공의지은 글이 으뜸으로 뽑혀 통헌대부로 승진되었다.

선조 계미1583 11월 무술시에 돌아가니 향년 이 69세였다. 임금이 부음을 듣자 놀라고 슬퍼하며 조회를 폐하고 부의를 후히 내리는 동시에 상장의 모든 절차를 관청에서 준비하도록 명하였다. 12월 임자 일에 옹주가 또 돌아가니 장지를 택하여 이듬해 3월 갑신일에 양근 고을 뒤 부평리 술좌지향 원에 안장하여 선영을 쫓아 동당 이실 하였으니 다 유명을 따름이었다.

옹주가 아들이 없어 아우 원경의 아들 호수로 뒤를 이은이 호수는 전 금천 현감으로 종실 의천군의 따님을 맞아 42녀를 낳았다.

공의 측실에 43녀가 있으니 乾秀(건수)와 乾壽(건수)는 다 관상감 정이요. 권수는 관상감 주부요. 건장은 관상감 부정이요. 딸은 한연경, 이숭, 이정 생에게 각각 출가하니 내외 손이 약간 명이다.

 공의 자질이 뛰어나고, 도량이 너그러워, 부모를 섬기고 제 매와 우애함에 다 도리에 맞게 하였으며. 아우와 누이가 혹은 먼저 죽고 혹은 일찍 홀로 되자 공이 모두 무휼 하여 지친의 은의를 다하였고 모든 조카들을 손수 맡아서 가취 시킨 것이 십여 명이다. 살림을 나누어 아우와 누이에게 주는 한편 부모의 유산도 전부 내어주고 공은 취하지 않았다. 공 이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어버이를 섬기되 먼저 그 뜻을 맞춰야 한다하고 또 이르기를 죽은 이가 다시 살아날 지라도 그 앞에서 부끄러움이 없으면 된다 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공의 평소에 가진 신조였다.

 성질이 안정하여 교류를 즐기지 않으며, 사람을 대할 때 신의가 있고, 일를 처리함에 사정에 얽매이지 않으며, 서사를 널리 설립하여 입을 열면 시장을 이루었다.

그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 시묘할 때, 어머니께 문안드리는 외에는 집에 내려오는 일 이 없었고, 어머니의 상사 때 너무 슬퍼하여 병이 되어, 복제를 마친 지 두어 달 만에 돌아갔으니 애속하도다.

 옹주는 성품이 유순하여 공을 섬긴 지 60년 조금도 어김이 없고 공의 모든 첩을 대하되 조금도 투기함이 없었다.

중종 임신 1512년 정월 신미일 에 출생하여 향년 72세로 돌아가니 공의 돌아간 날 과의 사이가 겨우 반달이다. 공과 한 날 장사 지내니 세상에 드문 일이라 하였다. 장례를 마친 뒤 날을 택하여 호수가 나에게 와서 지문을 부탁하되 아버지를 아는 이는 이모부 만한 분이 없다 하므로 사양 타 못하고 수락하였다.

광산 김씨의 족보를 보라 대대로 잠신이요 이름난 분 많았 도다.

 공이 이어 가업이 다시 컸고, 덕은 빛났고 향수 또한 길었도다. 진실로 옹주는 아름답고 유순 하였다. 좋은날을 택하여 한날에 안장하였다. 양근군 부평에 지문을 무덤에 묻어 먼 훗날까지 보도록 하노라.

礪城尉(여성위) 宋寅(송인)

출처 : 광산김씨공안공파보제 1권102-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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