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 김장생

by 有司 posted Sep 21,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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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김장생

전란 후 혼란기에 다시 예(禮)를 세운 학행지사

[ 沙溪 金長生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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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자 미상, 「전 김장생 초상」
      • 비단에 채색, 101.5×61cm,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출생 - 사망

1548년(명종 3) ~ 1631년(인조 9)

 

 

 

16세기 말 7년 왜란을 겪은 조선 왕조는 다시 17세기 초에 호란을 겪었다. 남쪽의 일본과 북쪽의 여진이 불과 40여 년의 시차를 두고 일으킨 전쟁이었다. 전통적으로 이들 남북의 오랑캐들은 자급 자족하지 못하고 약탈 경제에 의존했다. 왜란은 일본이 당대의 주도국인 명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조선을 전쟁터로 만든 것이고, 호란은 후금(여진족이 만주 지방에 세운 나라)이 중원을 도모하기 위해 명나라의 동맹국인 조선을 선제 공격한 것으로서 동아시아 전체가 전쟁에 휘말린 당시로서는 세계 대전이었다.

목축으로 생계를 꾸리는 유목민족 여진은 전염병 등으로 가축이 떼죽음을 당하면 중국이나 조선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다. 안정적인 농경 사회를 이룩하고 있는 중국이나 조선은 평화 공존의 논리인 유교에 입각하여 해마다 일정한 세미(歲米)를 전달하면서 달래는 한편으로 높고 긴 성을 국경 지대에 쌓기도 했다. 중국이나 조선 모두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적당히 달래는 정책을 썼던 것이다. 그런데 어느새 강성해진 여진이 후금을 건국하고 명나라를 치기 전에 먼저 조선을 침입하여 호란을 일으켰다.

남쪽의 일본이 중앙 집권적 통일 국가를 이룩한 것은 16세기 임진왜란 직전이었다. 그 이전 일본의 지방 정부는 왜구가 조선이나 중국 또는 동남아시아를 휩쓸고 다녀도 수수방관하거나 음성적으로 지원하는 형편이었다. 지방 경제의 상당 부분을 이들 일본해적의 약탈에 의존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왜구는 특히 조선 변방에 수시로 출몰하여 노략질을 일삼았고, 조선의 국력이 약화되는 쇠미기에는 수도권에까지 침략하여 식량뿐만 아니라 귀중한 문화재까지 마구 약탈했으므로 일본에 대한 조선의 피해 의식은 뿌리 깊은 연원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조선은 이들을 당연히 오랑캐로 치부했다.

이들 남쪽과 북쪽의 오랑캐가 일으킨 전쟁은 각기 차별성을 갖고 있다. 왜란이 7년이나 끈 장기전이었음에도 일본군을 국토에서 완전 추방한 승전이었다면, 호란은 몇 달밖에 안 되는 단기간의 전쟁이었음에도 국체의 상징인 왕(인조)이 여진의 청 태종에게 무릎을 꿇은 패전이었다. 왜란이 조선의 하부 구조를 완전히 파괴했다면, 호란은 조선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예의는 도덕 국가의 전제 조건

 

왜란과 호란의 양란 후 조선은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게 되고, 조선 사회에는 와해된 질서를 바로 세우려는 욕구가 일어났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민의 마음을 통합하기 위해 도덕적 문화 국가라는 국가 기본 방향을 설정하고, 사람과 사람이 상호 존중하는 사회의 구현이라는 정치 목표를 수립하였는데, 그것이 곧 예치(禮治)로 나타났다. 법으로 규제하면 피동적인 국민이 되고 예(禮)를 가르치면 스스로 알아서 행동하는 상식적인 국민이 된다. 예치는 예의바른 국민과 도덕적인 문화 국가를 만들기 위한 통치 방법이었고, 아울러 군사 대국인 청나라에 대응하는 고차원의 생존 전략이었다. 국가 간에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도덕적 입지를 강화하고, 평화 공존하는 국제 질서를 파괴한 국제적 무법자인 청나라를 쳐서 복수설치(復讐雪恥)하자는 슬로건으로 국민 의식을 고양시킨 것이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년)은 이 두 번의 전쟁을 모두 겪었다. 이는 개인적으로 불운이었지만 전란 후의 질서를 세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동기가 되었다. 김장생이 전후 질서 회복의 기본 방향인 예치의 이론가로서 활동하게 된 것은, 율곡학파를 모태로 한 서인 정파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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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서간」 종이에 먹, 30.7×22cm, 개인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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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집, 「서간」 초서, 1634년, 종이에 먹, 23.2×18cm, 개인 소장.
김장생의 아들 김집 역시 예학의 대가로 산당의 영수요, 기호 산림의 상징으로 활약하였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는 나름의 정신적 질서가 있게 마련이고, 그것은 윤리나 도덕으로 규정된다. 그 윤리와 도덕의 구체적인 실천규범이 예이다. 예는 도덕과 법의 중간 위치에서 강제성보다는 긍정적 권유를 특징으로 하는데 동양의 유교 사회에서 더욱 발달했다. 예의 본질은 인류 보편적인 것이지만 사회 상황과 문화 영역에 따라 상대적 특수성을 갖게 된 것이다.

조선 중기에 성리학의 이해가 심화되고, 그 우주론인 이기론(理氣論)에 이론적 기초를 둔 심성론이 발달한 것은 이상적 인간형을 만들기 위한 이론화 작업이었다. 심성론이 이상적 인간을 위한 것이라면 예는 사회 윤리를 위한 것이고, 예가 의(義)의 궁극적 표현방식이므로 사회 정의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뒷받침된 것이 조선성리학의 발전 과정이었다. 16세기 말 퇴계와 율곡이 성리학을 학문적으로 토착화하였고, 인심도심설(人心道心說)ㆍ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 심성론의 논쟁을 통해 인격 수양에 대한 이론화 작업을 마무리지었으며, 그러한 성과를 토대로 예의 탐구가 본격화하는 과정에서 왜란과 호란의 양란을 겪었다. 따라서 예의가 바로 서는 도덕 국가의 건설은 두 차례 전란으로 인해 기강이 무너진 조선 사회에서 최우선의 과제였다.

김장생은 서울 황화방 정릉동에서 김계휘(金繼輝)와 평산 신씨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광산, 자는 희원(希元)이다.

김장생의 생애를 크게 획을 그어 볼 때 출생에서부터 31세까지는 성장기가 된다. 성장기에서 하나의 전환점은 13세에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1534~1599년)을 따라 배운 일이다. 이때 성리학의 기본서인 『근사록 近思錄』을 배우며 학문적 기초를 쌓았다. 그 후 1567년 20세에 율곡의 문하에 들어갔고, 그의 적통을 계승함으로써 서인 학맥의 주축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에 성학(聖學)1)을 터득하고 예학에 정통하게 되면서 율곡으로부터 특별한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1577년 30세에 석담(石潭)에 있는 율곡을 찾아뵈었는데, 율곡은 이때 비로소 그의 수학기를 마감시켰다. 제2기는 31세(1578년)부터 66세(1613년)까지의 활동기로 볼 수 있다. 그는 시험에는 재능이 없었던 듯하다. 과거에 실패하고 추천으로 창릉참봉이 된 이래 지방관을 주로 역임하면서 학문의 축적에 전념했다. 1580년에는 33세로 파산(坡山)에 있던 우계 성혼(牛溪 成渾, 1535~1598년)을 찾아뵈었다. 이로써 김장생은 기호학파의 세 선생인 율곡, 구봉, 우계의 학문에 연원을 대었다. 그 선생들은 그의 아버지 김계휘와 동지이기도 했다.

 

조선적 예서 『가례집람』의 완성

 

김장생은 1599년 52세에 필생의 역작인 『가례집람 家禮輯覽』을 완성했다. 『주자가례 朱子家禮』를 미완성으로 간주하고 여러 예기의 학설을 모아 조목별로 해석하여 보충했을 뿐만 아니라 책머리에 도설(圖說)을 실어 고금의 의물(儀物)을 징험할 수 있게 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조선 현실에 적합한 예론의 정립에 있었다. 시의성을 주요 과제로 했던 것이다. 송나라 때 만들어진 예서가 시공을 뛰어넘어 3세기 이후의 조선에서 그대로 유효할 수는 없다는 인식 하에 조선에 맞는 예서를 만들어 낸 것이다.

16세기 사림은 상례와 제례를 행할 때 『주자가례』를 조금씩 자신의 가문이나 현실에 맞게 수정하거나 보완하였으므로 조선적 예서는 시대의 요구이자 사회의 요구였다. 가가견문(家家見聞)으로 쏟아져 나오는 예서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하고, 양란의 후유증을 예로서 극복해야 한다는 시대의 요구에도 부응한 것이 김장생의 『가례집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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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가례집람』

시의에 맞지 않는 『주자가례』를 수정 보완하여

조선의 현실에 적합한 예론을 정립하고

양란의 후유증을 예로써 극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되어 있다.

 

그가 사망한 후 벌어진 예송(禮訟)은 예의 기준이 정치 문제화한 것으로서, 서인과 남인 간 노선 분립의 주요 기점이 된다. 예론(禮論)을 탐구하는 학문이 예학(禮學)이고 예학의 입문서가 예서(禮書)이며 예론이 정치 문제화한 사건이 예송이다. 김장생은 그러한 일련의 지적 풍토에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김장생이 관직에서 은퇴한 것은 1613년(광해군 5년)의 일이다. 계축옥사에 김장생의 서제(庶弟)가 연루됨에 따라 그도 화를 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때 광해군은 장모인 정씨의 조언을 듣게 된다.

“그는 당세의 대유(大儒)로서 많은 선비들이 따르는데 이제 만약 체포하여 심문하면 크게 인심을 잃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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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경서변의』 김장생은 책을 읽으면서 의심스러운 것은 친구와 문인에게 물은 뒤 그 의견을 빠뜨리지 않고 함께 실었다.

 

 

 

 

 

김장생은 화를 면하였고, 이를 계기로 소극적인 벼슬살이마저 청산하고 은퇴했다. 1613년 무렵부터 1623년 인조반정까지 10여 년의 은퇴기는 다시 경전 공부에 침잠하는 기회가 되었다. 그의 학문 태도는 엄격하기 그지없었다. 독서할 때는 반드시 의관을 정돈하고 단정하게 위좌(危坐)1)하여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다했다.

그는 『소학』을 최고로 평가하고, 그 가르침을 종신토록 준칙으로 삼았다. 그리고 『중용 中庸』, 『대학 大學』, 『심경 心經』, 『근사록』 등의 책은 암송하여 자기말같이 했다. 이러한 독서의 결과물이 『경서변의 經書辨疑』였다. 어떤 책을 독서하면 그 책의 취지를 밝히고, 의심이 나거나 석연치 못한 부분을 변석하는 한편 친구나 문인, 후생에게도 문의하여 그들의 설까지 빠뜨리지 않고 함께 실은 것이다. 『경서변의』는 1618년 71세 때의 역작으로서 『가례집람』과 쌍벽을 이루는 그의 대표 저서이다.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에 엄격

 

1623년 인조반정은 김장생의 인생에 또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이 해 3월에 그는 76세의 노인으로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6월에는 ‘선비들을 가르치고 원자를 보도한다’는 명목으로 특설한 성균관 사업(司業)에 임명됨으로써 산림으로 예우받았다.

1624년 4월 그믐, 김장생에게 인조의 질문이 내렸다. 사친(私親)1)인 정원군(定遠君)의 제사 축문에 관한 것이었다. 제사의 축문에서 정원군을 고(考)2)로 칭하기로 했는데 조정의 논의가 분분하므로 고증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김장생의 대답은 사가(私家)의 논리가 왕실에 그대로 적용될 수 없으므로 사친이라 하더라도 ‘고’가 아닌 ‘숙(叔)’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군신(君臣)은 사친 관계에 상관없이 부자지의(父子之義)다. 인조는 선조에게 사친 관계로는 손자지만 입승대통(入承大統)했으므로 선조가 고(考)가 된다. 사친인 대원군(정원군)을 고라 한다면 대통을 오로지하지 못하고 이본(二本)을 만드는 것이므로 해례난륜(害禮亂倫)3)이다.”

선조는 열네 명의 왕자를 낳았고, 그 중 둘째 왕자인 광해군이 선조의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반정으로 쫓겨났다. 그래서 선조의 다섯째 왕자인 정원군의 아들이 왕위에 올라 인조가 되었다. 반정으로 쫓겨난 광해군을 왕으로 생각할 수 없는 일이고 보면 인조는 할아버지인 선조의 대를 이은 것이 되므로, 선조가 인조의 아버지가 되고 정원군은 인조의 숙부가 된다는 것이 김장생의 주장이었다. 왕실의 법이 사사로운 가정의 법과 같을 수 없으므로 선조(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정원군(아버지)을 숙부로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다시 조정의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인조도 김장생의 주장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사람에겐 할아버지가 있은 연후에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가 있은 연후에 자신이 있게 마련이다. 할아버지만 있고 아버지가 없을 수 있는가.”

결국 인조는 정원군을 대원군으로 봉해서 ‘고’의 정당성을 부여했고, 1627년에는 정원군을 원종(元宗)으로 추존함으로써 김장생의 예론에 쐐기를 박았다. 그러나 김장생의 예론은 정원군을 왕(원종)으로 추존하는 과정과, 정원군의 부인이자 인조의 어머니인 계운궁(啓運宮)이 사망했을 때의 복제(服制) 문제에까지 이어지면서 8여 년의 논쟁거리가 되었다. 이때 인조와 김장생, 예관들과 김장생 사이에 오고간 편지들이 『전례문답 典禮問答』으로 전해지는데, 김장생은 인조의 노여움을 사면서도 그 생애 마지막 예론에서까지 정원군의 원종 추존을 반대하며 숙부라 불러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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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계 김장생의 묘

 정일공 참배행사에서 발취

 

그러나 그는 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을 때는 77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피난길의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났을 때는 80 노구를 이끌고 의병을 모집하는가 하면, 강화도 행궁에 입시하는 등 임금에 대한 예를 다했다.

김장생은 1631년 사망할 때까지 당대 사림의 상징적 존재였고, 국가의 부름이 끊이지 않았던 말년의 7, 8년은 그 생애의 전성기였다. 반정공신 이귀(李貴, 1557~1633년)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년)에게 전해진 세도는 김장생에게 위임되어 서인 정권의 확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 후 그는 세도를 제자 송시열(宋時烈, 1607~1689년)에게 전승하여 서인 정파의 학문적, 정치적 핵심 인물이 되었다.

김장생의 아들인 김집(金集, 1574~1656년) 역시 가학(家學)을 이어받아 아버지의 예학을 완성하고 아버지 사후에 그 제자들까지 계승했으니 문인들은 김장생을 노선생으로, 김집을 선생으로 불렀다. 이 문하에서 배출된 많은 인재는 조선 후기 사회에서 서인 정파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데 초석을 놓았고, 이 문하에서 배출된 기라성 같은 인물군이 조선 후기 사회의 동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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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생 문묘배향교지」 문묘 배향은 당사자뿐 아니라 그 제자와 정파까지 학문의 정통성을 공인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선비들 최고의 영예였다. 김장생은 1717년(숙종 43년) 문묘에 배향되었다.

김장생은 이름 그대로 장수하여 84세로 서거했는데, 복을 입은 문인이 수백 명에 이르렀다. 고향인 연산의 진금면 성북리에 장례되었고, 사후 37년 만인 1688년에 문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누렸으며, 연산의 돈암서원(遯巖書院)을 비롯하여 안성의 도기서원 등 10여 개의 서원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원(文元)이다. 그의 성격은 ‘의론이 화평하고 각박한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비(是非)와 사정(邪正)은 엄격하게 따졌다’고 한 것에서 보이듯 꼿꼿한 선비의 표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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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충청도 노론 선비들 여론의 구심점이 되었던 서원으로 김장생, 김집 부자와 함께 송준길, 송시열을 제향하였다.
충청남도 논산군 연산면 임리 소재.

 

 [네이버 지식백과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