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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김씨의 시조와 유래

광산김씨는 신라의 왕자 김흥광이 신라 말기 혼란스러운 경주를 피해 무주(武州, 지금의 광주시)에 터전을 잡으면서 시작되었다. 김흥광이 신라의 왕자 출신이라는 것은 고려 충렬왕 때 제안황대전고(提按黃臺典誥) 벼슬을 지낸 김이(金珥)의 광산현제영시서(光山縣題詠詩序)에 나온다. 그 문건에 의하면 “이 고을은 신라 때 왕자 김흥광이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왕궁을 버리고 서인이 되어 이 땅 서일동에 와서 사셨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광산김씨의 시조 김흥광에 대해선 두 가지 설이 존재한다. 하나는 그가 신라 45대 신무왕의 셋째 아들이라는 설(정유대동보)과 다른 하나는 49대 헌강왕의 아들(동국만성보, 조선씨족통보)이라는 설이 있다.

하지만, 두 번째 가설은 신빙성이 높지 않다. 왜냐하면 신라 49대 헌강왕 시대에는 한두 건의 반란은 있었지만, 서울인 경주는 기와집에 숯으로 밥을 하는 대단히 화려했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토록 화려했던 경주에서 왕자가 혼란을 피해 무주로 숨어들어 은거했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오히려 흥덕왕 사후, 아버지를 왕위에 올리기 위해 희강왕과 다투다 패하여 청해진의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하였다가, 장보고의 힘을 빌려 민애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45대 신무왕의 이력을 볼 때, ‘광산현제영시서’의 글과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왕위에 오른 신무왕이 6개월 만에 죽고, 뒤를 이은 문성왕시대에도 친족 간의 왕권다툼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을 감안할 때, 첫 번째 주장이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광주에 자리를 잡은 김흥광은 그의 아들 김식(金軾)이 각간에 오르고, 손자 김길(金吉) 때에 고려에 귀의하여 무공을 세움으로써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되기에 이른다. 

더욱이 고려시대에 대대로 8명의 평장사(중서문하성의 정2품 부총리급)를 배출함으로써 ‘평장동’이라는 별칭까지 얻게 되었다. 따라서 본격적으로 광산을 본으로 삼은 때는 광산부원군으로 책봉된 고려 초기 이후로 판단된다.

하지만, 광산현제영서와 다른 기록도 보인다. 즉, 동지추밀원사를 지낸 김양감(金良鑑)의 아들 김의원(金義元) 묘지명에 쓰여 있는 나주광양현인(羅州光陽縣人)이라는 금석문이 있다. 

이로 인해 이수건 교수 등은 광산김씨가 광주의 토성으로 있다가 고려 말에 가문을 일으키고 중앙 정계에 진출한 뒤, 광양김씨 선계에 자신을 이어 붙인 것이라는 가설을 내세운다(고려토성연구 上). 그러나 이 주장은 고려시대 성관의 의미가 확고하지 않았으며 어떤 때는 출생지를, 어떤 때는 본관을 기록하는 경우가 함께 존재했고, 광산김씨가 인구도 많지 않고 뚜렷한 명문가문도 아닌 광양김씨에게 세계를 이어붙일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쉽게 납득되지 않는 가설이다.


철처-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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