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謙光겸광

조선 전기의 문신 (1419~1490) 字는 위경.

謙光은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그 후 감찰, 정언, 병조좌랑, 병조정랑을 거쳐 1460년(세조 6) 장령에 승진되었다. 

같은 해 신숙주(申叔舟)의 종사관이 되어 건주위(建州衛)의 야인을 정벌하는 데 공을 세우고 군기시정에 올랐다. 

1466년 개성부유수로 있을 때, 궐원이 된 평안도 절도사의 적임자로 천거를 받아 승진되어 임명되었다. 

1467년 예조판서에 승직되었고, 이듬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으며 1469년(예종 1)에 예조판서에 재임되었다. 

성종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고 공을 세워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광성군(光成君)에 봉해졌다. 

또한 1475년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82년 황해도 지방의 기근을 구제하기 위해 황해도 진휼사가 되었으며,

이듬해 우참찬이 되어 세조의 비인 정희왕후(貞熹王后)의 상례를 주관하였고, 

창경궁과 세자궁 중수의 책임을 맡아 처리하였다. 

1484년 좌참찬이 되고 1486년 세자좌빈객이 되었다. 

세조의 신임을 받아 평안도관찰사와 절도사를 지내면서 세조의 국방정책에 기여한 바가 컸다. 

경술 七月二十日에(享年72세) 卒하다. 

시호를 恭安公(공안공)이라 하고 不挑불도의 은전이 내린 사실이 여지승람에 기록이 있다. 

묘는 고종선영좌강신좌요 대사성 홍귀달이 신도비문을 지였다. 

配는 증정경부인 진주유씨니 父는 참판장식이며 조는 증사참의다.


겸광3.jpg


겸광비.jpg 신도비 

비문 내용 

▣정헌대부 의정부 좌참찬 겸 세자 좌빈객 광성군 시 공안공 겸광 신도비명(正憲大夫議政府左參贊兼世子左賓客光城君諡恭安公神道碑銘)공의 휘는 겸광이요 자는 위경이니 광산인이다. 영락 세종기해년 9월 정미일에 태어났다. ○세조경진(庚辰: 1460)에 북쪽 오랑캐 낭이승합이 왕화를 거스림으로 세조가 고령부원군 신숙주를 명하여 원수를 삼고 공으로 종사관을 삼아 가서 정벌케 하였는데 곧 평정하니 또 명을 받고 건주위 이만주족을 토벌하여 개선하여 돌아오니 그 공훈으로 5계급을 뛰어 통정대부 군기감정이 되었다. 그 때 공의 형 국광이 호조판서로 은권이 두터웠는데 상감께서 공의 사모를 벗기고 꽃을 꽂아주며 이르기를 "그대가 형보다 벼슬은 낮으나 형보다 현명하다" 하고 또 술을 권하니 그 총애함이 이와 같았다. 병술년에 평안도절도사가 결임되자 조정에서 물색하던 중 개성부윤으로 있는 공을 특별히 불러서 평안도 절도사로 보직하고 가정대부 품계를 내렸다. 이 해 겨울에 정경부인이 병환중이었는데 상감이 하서하되 "이제 농사도 끝마쳤고 강물도 아직 얼지 않아서 군무도 여가가 있으니 경은 가서 관병하라" 하였다. 공이 곧 돌아와 복명하니 예조판서 겸 의금부사에 임명되었다. 공의 성품이 순근하고 지조가 독후하여 윗 사람을 섬김에 충성을 다하고 아래 사람을 대접함에 공손하며 효도하고 우애하여 간격이 없고 친구와 사귐에 신으로 하고 일에 임하여는 직책을 다하여 확실하게 지키는 바가 있고 변방의 변란을 방비함에 틈이 없고 모든 일에 치밀하여 옳지 아니함이 없으니 능히 여러 임금을 보필하여 마침내 공명과 은택으로 일생을 마쳤고 남은 경사가 자손에게 미쳤으니 이를 가히 명할만 하여 명하노니,
거룩한 성조시여 품식을 더하고 주위를 곽청하니 우리 성상이 받들어 혹은 계술하며 혹 진작하였네 우리가 태평을 누리고 예악이 빛나도다 누가 함께 도왔던고 거룩한 우리 동덕일세 드높은 광성군이여 몸은 하나로되 쓰이기는 백 가지나 되는 듯 안과 밖으로 남북으로 들어오면 재상이요 나가면 장수로다. 왕이 공에게 하문함에 아뢰노니 아름다운 술수로다 임금의 수족되어 선후를 알아 분주하며 포부를 펴 아뢰도다 이에 공을 신뢰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네 능운대와 응연각은 공의 집이요 단서철권은 공의 훈렬이로다 공이 절하고 머리 숙여 아뢰는 일은 싫어하지 아니하네 자손에게 끼친 음덕 길이 무궁하리 내 명이 아첨이 아니라 오직 실적을 적었노라
弘治五年三月 日 成均館 大司成 洪貴達 撰略


겸광1.jpg

충남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 3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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