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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璉) 양간공

양간공 연 (良簡公 璉)은 양간공의 파조로 1215년(고종3) ~ 1291년(충렬왕18) 고려 중기의 문신, 초명은 중룡(仲龍), 아버지는 증문하시랑(贈門下侍郞) 평장사(平章事) 대린(大鱗)이며 어머니는 익양군부인 광주김씨(光州金氏)로 호장보윤(戶長甫尹) 준령(俊령)의 딸이다. 


  천품이 준수 비범하였고, 눈섭이 그림같이 아름답고 맑았으며 어릴 때부터 내시(內侍)가 되어 임금을 가까이 모셨다. 1255년(고종43) 시어사(侍御史)가 되어 선정하였고, 네 고을에 치척을 남겼으며 병부시랑(兵部侍郞) 추밀원(樞密院) 부사(副使)를 거쳐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다. 


1275년(충렬왕2)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동정(東征: 원나라와 연합하여 일본을 정벌하는 일)할 전함 900척을 만들 때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때 어느 날 밤에 홀연히 꿈에 허리에 찬 금어(金魚: 벼슬아치가 차고 다니던 황금으로 물고기 모양처럼 만든 주머니)가 땅에 떨어지니 스스로 해몽하기를 "몸의 장식이 이미 갔으니 이제 오래 머물 수 없다."하고 사퇴하니 지도첨의(知都僉議)로 승진시키고 이어 광정대부(匡靖大夫) 첨의시랑(僉議侍郞)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고 1781년(정조6) 고창군 고수면 전불 노산사(蘆山祠)에 배향되었다.

신유년(1261년) 호적과 화상찬(畵像贊)이 있었으나 화상찬은 1592년(선조26)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1261년(원종3)에 발행된 호적(戶籍)이 후손 부필(富弼)의 종가에 보존되어 있으니 우리나라에 현조하는 가장 오래된 호적이다. . 

묘는 실전되어 1986년 논산군 연산면 고정리에 좌는 큰 아들 정경공[사원(士元)] 우측에는 참지정사공[사형(士亨)]과 함께 설단하였다.(단향일 : 음력 3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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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명도감 발취 

  1487년(성종 18)∼1544년(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적(子迪) 또는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성균관생원 김효로(金孝盧)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진사시의 양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52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그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는데 이때 김안로일당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주살되고, 그 일당이 축출되면서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어 1542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 및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특히 농정(農政)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한발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 지방에 대한 구황사업(救荒事業)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154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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