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株永주영


고려 후기의 문신, 벼슬은 금오위중랑장동정행대정(金吾衛中郞將同正行隊正)을 지냈고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호부상서상장군(戶部尙書上將軍)에 추증(追贈)되었다 

금오위 중랑장 동정 행대정 증 동지 추밀원사 호부상서 상장군 유사 金吾衛 中郞將 同正 行隊正 贈 同知 樞密院事 戶部尙書 上將軍 遺事 후손 문경공 집은 가로대 휘(諱) 주영(珠永)은 세계(世系)에 상고하기가 가히 어렵도다. 양간공 휘(諱) 연(璉)의 호구를 조사하건대 원(元) 대덕(大德)5년 한 호적에 기재된 부조로 증조 주영(珠永)에 이르렀고 또 김이(金珥)의 세계서(世系序)를 상고하면 이것이 대덕(大德)11년에 기재한 바인데 충정공 휘(諱) 의원(義元)은 그 현조(玄祖)라 하였고 대개 연(璉)과 이(珥)는 필시 일시지인(一時之人)인 듯 하고 이름자가 옥자(玉字)변에 서로 같으니 반드시 형제항렬인 듯 하다. 
충정공에서 주영에 이르기까지 원친(遠親)은 아니듯 하다. 문충공 만기 가로대 휘(諱) 의원(義元)으로부터 주영(珠永)에 이르기까지 몇 대(代)가 되는지 상고(詳考)키 어렵고 또 세칭 팔대 평장사라고 하였는데 지금에 칠대뿐이니 반드시 세대의 부전(不傳)함이 있는 듯 하고 영남의 한 족보에는 주영으로서 의원의 아들로 되었음은 이 무엇에 근거함인지 알 수 없으니 혹 가로대 의원의 아우 의문(義文)이 시중(侍中)이니 칠대 팔평장사라고 할 수 있으니 실로 궐대(闕代)함이 없다고 말한다. 제종(諸宗)의 세계(世系)를 상고하건대 충정 및 중랑이 부자가 된다고 하매 그 연수(年數)를 상고하면 서로 가까운 것 같으되 문경공 문충공 말씀이 이와 같은 고로 아울러 기록하여 두니라. 구보에 상고하건대 상장군 공이 충정공에게 아들인지 손자인지 대수가 미상하매 문경공 문충공이 궐오(闕誤)를 의심하사 변론하였고 또 충정공 유택이 실전된지 천여년이러니 마침 경술년 봄에 지석(誌石)이 현출되므로 장단군 능동에 찾아서 다시 봉안하였도다. 
오호라 오조(吾祖)에 누누(累累)한 인덕 여음(餘蔭)있음에 어찌 영비(永?)있으리요, 천리(天理)의 소소(昭昭)함을 증험 하리로다. 지문을 상고하건대 충정공이 삼자를 두셨는데 장자 휘(諱)는 광중 관(官)은 평장사이요 차자 휘(諱) 대균 계자에 휘(諱) 대용이다. 연즉(然則) 전보(前譜)에 기재된 바 자(子)가 아니면 손(孫)이라 팔대 평장의 말이 소소(昭昭)이 징거(徵據)가 된다. 연후(然後)이 문경공 문충공이 추고(推考)의 정밀(精密)하심을 가일층 탄복하리로다. 단지 지석에 자서(子?)만 기재되고 손항렬이 없으니 아마도 그때에 현존한 분만 기재한 것이 아닌가 싶다. 상장군공이 문림랑 장(長) 중(仲) 계(季) 중(中)에 그 모공(某公)의 자(子)라 함이 미상한지라 일이 중대하여 미안하나마 세계도(世季圖)중에 감히 명시치 못하고 다만 남은 대수만 기록하고 아울러 전말만 기록하여 내세를 기다리노라. 묘소 실전이 어느 때인지 알 수 없고 수백년을 변씨가 수호하였다. 경술년 봄에 강도들이 삼한의 고기(古器)를 캐기 위하여 신라와 려조의 능묘를 발굴하다가 충정공 지석(誌石)이 현출한 고로 다시 봉축하여 봉안 수호하였다. 또 상고하건대 충정공이상 팔대 휘(諱) 호(號) 관직(官職)은 제안공 김이의 서문에 의하여 족보를 간행 하였는데 문안공이상 삼세 휘(諱)는 지문과 더불어 부동한 고로 지문에 의하여 고정(考正)하는 바이다. 계축 동지날에 후손 종사랑(從仕郞) 장예원(掌禮院) 전사(典祀) 종현(琮鉉) 추지(追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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